꽃 양귀비, 두 미인의 이름을 얻은 꽃 — 마이크로로 들여다본 화려한 속살

요즘 초여름이면 전국 곳곳이 붉게 물듭니다. 꽃양귀비 군락 이야기예요. 서울 올림픽공원 들꽃마루, 원주 용수골, 하동 북천, 울산 태화강 국가정원처럼 넓은 꽃밭이 조성되면서, 바람에 붉은 파도가 출렁이는 그 풍경을 보려고 사람들의 발길이 끝없이 이어지죠.

그런데 이 꽃, 이름부터 예사롭지 않습니다. 무려 두 미인의 이름을 나눠 가진 꽃이거든요. 오늘은 그 이야기와 함께, 마이크로 렌즈로 꽃양귀비 한 송이 속으로 들어가 보려 합니다.

미인의 이름을 얻은 꽃

원래 이 꽃 종류의 옛 이름은 ‘앵속(罌粟)’이었습니다. 그런데 얇은 비단 같은 꽃잎이 어찌나 고왔던지, 사람들은 중국 역사상 최고의 미인으로 꼽히는 당나라 현종의 후궁 양귀비(楊貴妃) 에 빗대어 이 꽃을 ‘양귀비’라 부르기 시작했습니다. 나라를 기울게 할 만큼 아름다웠다는 ‘경국지색’의 이름을, 한 송이 꽃이 물려받은 셈이죠.

우리가 공원에서 보는 붉은 꽃양귀비에는 또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바로 ‘우미인초(虞美人草)’ 예요. 초나라 항우의 연인이었던 우미인은, 항우가 사방을 포위당해 사면초가에 몰리자 마지막 술자리에서 노래를 부른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전해집니다. 그 무덤가에 비단처럼 얇고 붉은 꽃이 가련하게 피어났고, 사람들은 그것을 우미인의 넋이라 여겨 우미인초라 불렀다고 하죠.

재미있는 건, 아편 성분이 있는 ‘진짜’ 양귀비에는 나라를 흔든 경국지색 ‘양귀비’의 이름이, 아편 성분이 없는 관상용 개양귀비에는 비극적이고 순정한 ‘우미인’의 이름이 붙었다는 점이에요. 화려함과 애틋함, 두 미인의 사연이 한 꽃 안에 절묘하게 겹쳐 있는 셈입니다.

(참고로 우리가 축제나 화단에서 만나는 꽃양귀비·개양귀비는 마약 성분이 없는 관상용 품종으로, 재배가 허용된 꽃이에요. 아편 성분이 있는 양귀비는 따로 있고 재배가 금지되어 있으니, 이 둘은 전혀 다른 꽃이라고 보시면 됩니다.)

잠과 위안의 꽃

서양으로 건너가면 이야기가 또 달라집니다. 그리스 신화에서 풍요의 여신 케레스는 딸을 잃은 슬픔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잠의 신이 양귀비를 건네 여신을 깊이 잠들게 했다고 해요. 충분히 쉰 여신은 다시 대지를 돌보았고, 그 뒤로 곡식의 화관에 양귀비를 꽂았다고 전해집니다. 그래서 이 꽃의 꽃말은 위안, 위로, 몽상이에요. 색깔마다 의미가 조금씩 달라, 붉은색은 위안과 몽상을, 흰색은 망각과 잠을 뜻하기도 합니다.

마이크로로 본 꽃 양귀비의 속살

이제 렌즈를 들이대 봅니다. 멀리서 보면 그저 ‘붉은 꽃’이지만, 가까이 갈수록 꽃양귀비는 색의 만화경이 됩니다.

붉은 꽃잎 네장과 가운데 암술과 수술이 드러난 꽃 양귀비

[사진 : 붉은 꽃잎 네 장과 가운데 암술·수술이 드러난 꽃 양귀비 ]

먼저 얇고 주름진 꽃잎 네 장. 마치 구겨진 비단 같죠. 사실 이 주름에는 사연이 있어요. 꽃양귀비는 봉오리일 때 고개를 푹 숙인 채 까끌한 솜털에 싸여 있다가, 필 때가 되면 껍질처럼 감싸던 꽃받침을 벗어 던집니다. 그 좁은 껍질 안에 구겨 넣어 두었던 꽃잎을, 마치 접어 둔 손수건을 펴듯 활짝 펼치는 거죠. 그래서 갓 핀 꽃양귀비의 꽃잎에는 늘 그 구김의 흔적이 남아 있습니다. 그 한가운데에 이 꽃의 진짜 무대가 있습니다.

노란 꽃밥-수술의 마이크로 사진

[사진 : 노란 꽃밥(수술) 마이크로]

색과 모양이 제 각각인 수술들의 마이크로 사진

[사진 : 색과 모양이 제각각인 수술들 마이크로]

꽃잎을 둘러싸고 촘촘히 늘어선 것이 수술입니다. 재미있는 건, 같은 꽃양귀비라도 수술 색이 제각각이라는 점이에요. 어떤 것은 노란 꽃밥을 달고, 어떤 것은 짙은 보라나 검은빛을 띠죠. 마이크로로 보면 꽃밥 표면에 알알이 맺힌 꽃가루까지 그대로 드러납니다.

방사형 별 모양으로 갈라진 암술머리의 마이크로 사진

[사진 : 방사형 별 모양으로 갈라진 암술머리 마이크로]

그리고 꽃 한가운데, 별처럼 방사형으로 갈라진 것이 암술머리입니다. 이 갈래 하나하나가 아래 씨방의 칸과 연결되어 있어서, 갈래 수를 세면 그 안에 몇 개의 방이 들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어요. 분홍에서 자홍까지, 이 별 모양의 색도 꽃마다 다릅니다. 우리가 ‘양귀비’라고 뭉뚱그려 부르지만, 마이크 속 세계에서는 저마다 다른 얼굴을 하고 있는 셈이죠.

한 송이에 3만 개의 씨앗

꽃이 지고 나면, 꽃양귀비는 또 다른 모습으로 변신합니다.

다양한 수술의 꽃가루들, 꽃 양귀비의 마이크로 꽃가루 사진

[사진 : 다양한 수술의 꽃가루 마이크로]

동그란 열매는 마치 작은 후추통처럼 생겼어요. 다 익으면 윗부분의 작은 구멍이 열리고, 바람이 흔들 때마다 그 안의 씨앗이 솔솔 뿌려집니다. 얼마나 많은 씨앗이 들어 있을까요. 식물 분류학의 아버지 린네는 양귀비 한 송이에서 무려 3만 개가 넘는 씨앗이 나온다고 기록했습니다. 그 작고 여린 꽃잎 뒤에, 이렇게 강한 번식력이 숨어 있는 거죠.

붉은 물결 앞에서

꽃양귀비를 사진에 담고 싶다면, 오전 시간을 노려 보세요. 이 꽃은 아침에 활짝 벌어지는 경우가 많고, 얇은 꽃잎이 빛을 머금으면 안쪽까지 붉게 투과되어 유리처럼 빛납니다. 바람이 잠시 잦아든 순간, 흔들림이 멈춘 그때 한 컷을 담으면 수술과 암술머리의 색까지 또렷하게 남길 수 있어요.

다음에 공원의 꽃양귀비 군락 앞에 서게 되거든, 붉은 물결에 감탄한 뒤 딱 한 송이만 가까이 들여다보세요. 노란 수술, 별 모양 암술머리, 그리고 비단 같은 꽃잎 — 미인의 이름을 얻은 꽃답게, 그 속에는 우리가 미처 몰랐던 또 하나의 우주가 숨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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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저작권은 Dr. KOSUNA에게 있으므로 무단 복제 금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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