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랭이 꽃, 본 적 있으세요? — 잡초의 여왕을 현미경으로 보다.

길가에 흔한 잡초, 바랭이. 보도블록 틈이든 화단 가장자리든 운동장 구석이든, 밟히고 뽑혀도 며칠이면 아무 일 없었다는 듯 다시 그 자리에 서 있는 풀입니다.

일본의 한 식물학자는 이 바랭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꽃의 여왕이 장미라면, 잡초의 여왕은 바랭이다.”

그만큼 강인하고, 그만큼 흔합니다. 그런데 이 흔하디흔한 풀에게도 꽃이 핀다는 사실, 알고 계셨나요. 오늘은 매크로 렌즈를 들고 그 발밑으로 내려가, 아마 평생 한 번도 본 적 없을 바랭이의 꽃을 만나러 갑니다.


멀리서 보면, 그냥 풀

손바닥처럼 갈라져 사방으로 뻗은 바랭이 이삭 전초의 모습

[사진 : 손바닥처럼 갈라져 사방으로 뻗은 바랭이 이삭 전체 모습]

한 발 물러서 봅니다.
바랭이는 줄기 끝에서 몇 가닥의 이삭을 손바닥 펼치듯 사방으로 뻗습니다. 부채살처럼, 작은 불꽃놀이처럼요. 대부분의 사람이 바랭이에게서 보는 건 딱 여기까지입니다. “길가에 난 이름 모를 풀” 정도로요.


조금 더 가까이 — 빛을 머금은 잔털

초록 이삭 위 은빛 잔털이 빛나는 바랭이의 600배 렌즈로 본 모습

[사진 : 초록 이삭 위 은빛 잔털이 빛나는 바랭이_600배]

렌즈를 조금 더 밀어 넣습니다.
초록 알갱이 위로 은빛 잔털이 실처럼 뻗어 나와 빛을 머금습니다. 맨눈으로는 그저 매끈해 보이던 표면이, 이 배율에서는 완전히 다른 세계가 됩니다. 이 잔털 하나하나가 이슬을 붙들고 빛을 흩뿌려, 작은 이삭을 은빛으로 물들입니다. 아직 꽃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조금만 더 기다려 보죠.


그리고, 아무도 본 적 없는 꽃

초록 이삭 끝에 자홍색 암술과 보라빛 꽃이 드러난 바랭이의 200배 마이크로 사진

[사진 : 초록 이삭 끝에 자홍색 암술과 보랏빛 꽃이 드러난 바랭이_200배]

자홍색 깃털 암술과 보라색 꽃밥이 활짝 피어난 500배 렌즈로 본 바랭이

[사진 : 자홍색 깃털 암술과 보라색 꽃밥이 활짝 드러난 바랭이_500배]

여기,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초록 껍질 사이로 어느 순간 자홍색 깃털보랏빛 알갱이가 밀려 나옵니다. 화려한 꽃잎도, 향기도 없지만 — 이것이 바랭이의 꽃입니다.

저 진분홍 깃털은 꽃가루를 받아 내는 부분이고, 옆에 매달린 보랏빛 주머니는 꽃가루를 담고 있는 부분입니다. 바랭이는 나비나 벌이 아니라 바람에게 꽃가루받이를 맡기는 풀이에요. 그래서 벌레를 부를 화려한 꽃잎을 굳이 만들지 않습니다. 대신 바람에 실려 오는 꽃가루 한 톨이라도 붙잡으려고, 암술을 저렇게 깃털처럼 잘게 펼쳐 놓았죠. 진분홍과 연보라의 이 작은 조합은, 누가 봐 주지 않아도 해마다 어김없이 피어나는 색입니다.

아마 이 얼굴을 평생 한 번도 본 적 없는 분이 대부분일 겁니다. 너무 작고, 초록에 묻히고, 피어 있는 시간도 짧고, 무엇보다 우리 눈높이보다 낮은 ‘밟히는 높이’에서 피어나니까요. 고개를 숙이고 아주 가까이 다가가 마이크로 렌즈를 들이대야 만 겨우 만날 수 있는 꽃입니다. 마이크로 렌즈의 매력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늘 지나치던 발밑의 세계로 우리를 다시 데려가, 흔한 풀 한 포기가 이토록 정교한 얼굴을 품고 있었다는 놀라움을 되돌려 주니까요.

바랭이는 언제, 어디서 볼 수 있을까

바랭이의 꽃은 대개 한여름부터 초가을(7~10월) 사이에 핍니다. 특별한 곳을 찾아갈 필요도 없어요. 아파트 화단, 학교 운동장 가장자리, 주차장 시멘트 틈, 산책로 옆 — 도시 어디서든 바랭이는 자랍니다. 오히려 너무 가까이 있어서 그동안 눈에 담지 못했을 뿐이죠.

맑은 날 아침, 이삭이 막 벌어지는 무렵에 다가가면 그 작은 꽃을 만날 확률이 가장 높습니다. 거창한 장비도 필요 없어요. 스마트폰에 끼우는 접사 렌즈 하나만 있어도, 이 자홍빛 깃털을 충분히 담을 수 있습니다. 바람이 잦아든 순간을 기다렸다가 숨을 멈추고 한 컷, 그렇게 만난 바랭이 꽃은 오래도록 기억에 남습니다.

왜 ‘여왕’일까

화려하지도 않은 이 풀이 어째서 ‘잡초의 여왕’일까요.

한 포기가 무려 만(萬) 단위의 작은 꽃을 피우고, 그만큼 많은 씨앗을 사방에 흩뿌립니다. 게다가 그 씨앗들은 한꺼번에 싹트지 않고 시차를 두고 올라와서, 뽑고 또 뽑아도 다음 세대가 이어집니다. 줄기가 땅을 기다가 마디마다 새 뿌리를 내려, 한 몸이 여러 포기가 되기도 하죠.

요란하지 않게, 그러나 조용하고 끈질긴 방식으로 자리를 지키는 풀. 바랭이에게 ‘여왕’이라는 별명이 아깝지 않습니다.


발밑의 풀, 그 오래된 쓰임흔하다고 쓸모까지 없었던 건 아닙니다.

예부터 바랭이는 소와 말이 사탕처럼 잘 먹는 풀이라 하여, 중국에서는 ‘마당(馬唐)’ 이라 불렀습니다. 좋은 목초였던 셈이죠. 한방에서는 소화를 돕고 마른 폐를 부드럽게 한다 하여 약재로 쓰였다는 기록도 전해집니다. (다만 이건 옛사람들의 민간 지식이니, 의학적 효능으로 받아들이기보다 “이런 이야기가 전해진다” 정도로 가볍게 즐겨 주세요.)

우리말 이름 ‘바랭이’의 유래는 정확히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옛 문헌에 ‘팔근초(八根草)’라는 향명이 남아 있어 ‘밭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풀’이라는 뜻에서 왔으리라 짐작하기도 합니다. 이름 하나에도 이 풀이 얼마나 오래 우리 곁에 있었는지가 담겨 있는 셈이죠.

재미있는 건, 바랭이의 사촌뻘인 서아프리카의 포니오(fonio) 는 지금도 사람이 먹는 곡식으로 재배된다는 점이에요. 발밑에서 밟히는 잡초와, 누군가의 소중한 주식(主食)이 한 집안인 셈입니다.

다음에 만나면

다음에 바랭이를 만나거든, 잠깐 멈춰 무릎을 굽혀 보세요. 운이 좋다면 그 자홍색 깃털과 보랏빛 꽃밥을, 두 눈으로 직접 만날 수 있을지도 모릅니다.

흔하다는 건 아름답지 않다는 뜻이 아닙니다. 그저 우리가 자세히 들여다본 적이 없었을 뿐이죠.

잡초의 여왕은, 오늘도 발밑에서 조용히 꽃을 피우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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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에 대한 저작권은 Dr. KOSUNA에게 있으므로 무단 복제 금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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