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꽃 이야기 — 무지개 여신이 남긴, 곤충을 위한 활주로

검은 배경 위에 놓인 보라색 붓꽃 한 송이 — 아래로 처진 외화피에 노란색·흰색 유도무늬와 자주색 실핏줄, 위로 곧추선 내화피, 가운데 꽃잎처럼 넓어진 암술대가 보임

무지개가 남기고 간 꽃

여름의 문턱, 입하(立夏) 무렵이면 이 꽃이 핍니다. 곧게 선 칼 같은 잎 사이에서 꽃대가 솟아, 끝에 보라색 꽃을 매답니다. 이름부터가 예사롭지 않아요. 학명 속 Iris는 라틴어로 무지개를 뜻하고, 그리스 신화에서 무지개가 의인화 된 여신이자 신들의 전령인 이리스의 이름이기도 합니다. 비 갠 뒤 운이 좋아야 잠깐 보이는 무지개처럼, 붓꽃의 꽃말도 ‘기쁜 소식’, ‘신비로운 사람’이지요.

그런데 이 꽃은 보이는 대로가 아닙니다. 얼핏 꽃잎 여섯 장이 우아하게 펼쳐진 것처럼 보이지만, 렌즈를 가까이 대는 순간 이건 그냥 예쁜 꽃이 아니라 곤충을 안내하기 위해 치밀하게 설계된 장치라는 게 드러납니다.

울타리 곁 화단에 무리 지어 자란 붓꽃 — 칼처럼 곧고 긴 초록색 잎이 부챗살처럼 포기로 서 있고, 바닥에는 마른 잎이 깔려 있음

칼을 닮은 잎, 곧추선 꽃대

붓꽃은 들과 산기슭, 그리고 이렇게 울타리 곁 화단에서도 무리 지어 자랍니다. 잎은 칼(검) 모양으로 곧고 길게 서고, 뿌리줄기가 옆으로 뻗으며 새 포기를 늘려 가지요. 영어 이름 하나가 이 잎에서 왔습니다. 유럽에서는 붓꽃 종류를 흔히 flag라 부르는데, 곧게 선 잎이 깃발처럼 보인다는 뜻입니다.

이름 ‘붓꽃’은 다른 데서 왔어요. 피기 직전의 꽃봉오리가 먹물을 머금은 붓끝을 꼭 닮았다 하여 붙은 이름입니다. 학명은 Iris sanguinea, 붓꽃과(Iridaceae) 붓꽃속(Iris)에 듭니다. 참, 프랑스 왕실의 상징으로 알려진 백합 문장(紋章, fleur-de-lis)도 사실은 백합이 아니라 이 붓꽃을 본떴다는 설이 유력합니다.

여섯 장처럼 보이는, 세 개의 비밀

이제 붓꽃의 진짜 얼굴을 봅니다. 꽃을 이루는 조각은 크게 세 종류예요.

  • 외화피(外花被) 3장 — 아래로 넓게 처진 큰 조각. 여기에 노란 유도무늬가 있습니다(falls).
  • 내화피(內花被) 3장 — 위로 곧추선 조각(standards).
  • 암술대(花柱) 3갈래 — 놀랍게도 암술대가 꽃잎처럼 넓적하게 변한 것입니다(petaloid style arms).

즉 우리가 ‘꽃잎’이라 여기던 것 중 일부는 사실 암술이에요. 그리고 이 꽃잎처럼 변한 암술대가 활처럼 휘어 그 바로 아래에 수술을 감춰 둡니다. 왜 이렇게 복잡하게 만들었을까요?

바로 곤충을 위한 일방통행 활주로를 만들기 위해서입니다. 꿀을 찾아온 벌은 노란 유도무늬를 따라 외화피 위에 내려앉고, 꿀을 향해 기어들어 가면서 위에 드리운 암술대·수술 사이를 통과합니다. 이때 몸에 묻혀 온 다른 꽃의 꽃가루가 먼저 암술머리에 닿고, 나올 때 이 꽃의 꽃가루를 새로 묻혀 갑니다. 제꽃가루받이를 피하고 딴꽃가루받이를 유도하는 꽃이 스스로 설계한 정교한 순서지요.

붓꽃 외화피의 유도무늬 극접사 — 노란색 바탕에 짙은 자주색 줄무늬와 반점이 갈래처럼 뻗고, 표면은 오톨도톨한 돌기(유두상 세포)로 덮여 있음
붓꽃 암술대 끝의 갈라진 볏 부분 접사 — 짙은 보라색 조각의 끝이 둘로 갈라지고 가장자리가 섬세한 실술처럼 잘게 갈라져 있음
붓꽃 꽃잎 끝 접사 — 반투명한 보라색 조각에 별빛처럼 흰 점(빛을 머금은 세포 돌기)이 박히고, 가장자리는 미세한 톱니처럼 잘게 갈라짐

네모 안의 활주로

붓꽃의 ‘활주로 표지’를 확대해 봅니다. 노란 바탕에 짙은 자주색 줄무늬가 갈래처럼 뻗어 있지요. 이것이 바로 꿀길 안내표시(nectar guide) 벌의 눈에는 이 무늬가 “이쪽으로 들어오라”는 유도등처럼 보입니다. 표면을 자세히 보면 오톨도톨한 유두상(乳頭狀) 돌기로 덮여 있는데, 이 미세한 요철이 향기샘을 품거나 벌의 발이 미끄러지지 않게 붙잡아 주는 역할을 합니다.

사진은 꽃잎처럼 변한 암술대의 끝(볏)입니다. 끝이 둘로 갈라지고 가장자리가 실술처럼 잘게 나뉘어 있어요. 이 볏 바로 아래 안쪽에 꽃가루를 받는 암술머리가 숨어 있습니다. 사진 ⑤에서는 꽃잎 자체의 살결이 드러납니다. 반투명한 보라색 조직에 별빛처럼 박힌 흰 점들은 빛을 머금은 세포 돌기예요. 맨눈에는 매끈한 보라 한 장이었던 것이, 현미경의 네모 안에서는 밤하늘처럼 펼쳐집니다.

흔한 보라꽃 한 송이 안에, 색과 무늬와 질감으로 쓴 곤충용 안내판 한 세트가 통째로 들어 있는 셈입니다.

무지개의 그늘 — 사라져가는 붓꽃들

붓꽃과는 남극을 뺀 전 세계에 약 90속 1,500여 종이 퍼져 있고, 우리나라에도 십수 종(약 13~17 분류군)이 자생합니다. 그런데 국립생물자원관에 따르면, 우리 자생 붓꽃류의 약 60%가 멸종위기 또는 희귀식물입니다. 아름답다는 이유로 무분별하게 캐어 가는 남획, 그리고 낮은 산지·습지에 살아 개발로 자생지가 파괴되는 것이 큰 원인이지요.

특히 선생님이 짚어 주신 두 지역의 붓꽃이 대표적입니다.

  • 노랑붓꽃(Iris koreana) 전 세계에서 오직 우리나라 전라도(내장산·변산반도)와 경북 일부, 북한에만 사는 한반도 특산종입니다. 한 꽃대에서 노란 꽃 두 송이가 차례로 피는 것이 특징이고, 2012년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으로 지정됐습니다. 이 땅에서 사라지면 지구에서 완전히 사라지는 꽃이지요.
  • 제비붓꽃(Iris laevigata) 백두산 주변 습지에는 흔하지만 남녘에서는 자생지와 개체수가 매우 적은 북방계 습지 붓꽃으로, 역시 멸종위기 야생생물 II급입니다.

무지개 여신의 이름을 가진 꽃이, 정작 무지개처럼 점점 보기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닫는 글 — 무지개는 잡을 수 없다

무지개는 손에 쥘 수 없습니다. 다가가면 물러나고, 비가 그치면 사라지지요. 붓꽃은 그 무지개의 이름을 가진 꽃이면서, 정작 제 몸속에는 곤충을 부르는 노란 길과 암술이 감춘 활주로를 촘촘히 새겨 두었습니다.

여섯 장처럼 보이던 것이 실은 세 개의 서로 다른 마음이었고, 매끈해 보이던 보라 한 장이 별빛의 세포였습니다. 네모난 렌즈 안에서 오늘도 붓꽃은, 보이는 것 너머의 세계를 조용히 펼쳐 보입니다. 다만 이 무지개가 다음 계절에도 그 자리에 있어 주기를, 가만히 바라게 됩니다.

— 네모안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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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저작권은 Dr. KOSUNA 에게 있으므로 무단 복제 금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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