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게라텀 이야기 — 늙지 않는 꽃, 솜방망이 하나가 수십 송이인 이유

초록 잎을 배경으로 핀 연보라색 아게라텀 꽃 — 가느다란 실 같은 꽃들이 솜방망이처럼 둥글게 뭉쳐 여러 송이가 모여 있음

만지고 싶은, 파란 솜방망이

여름 화단에서 이 꽃을 보면 손이 먼저 갑니다. 파란빛이 도는 보라색 솜방망이가 보들보들 뭉쳐 있어, 꼭 작은 분첩 같거든요. 작지만 자꾸 눈이 가고,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신기해지는 꽃 아게라텀입니다.

그런데 이 ‘한 송이’는 사실 한 송이가 아닙니다. 렌즈를 가까이 대는 순간, 솜방망이 하나가 수십 송이의 작은 꽃이 모여 이룬 공동체라는 게 드러납니다. 오늘은 이 파란 솜뭉치 속으로 들어가 봅니다.

햇빛 아래 아게라텀 두상화 접사 — 연보라색 실 같은 꽃들이 뭉친 머리 아래로 초록색 총포 조각과 잔털 돋은 줄기가 보임

늙지 않는 꽃, 불로화

아게라텀의 우리 이름은 불로화(不老花) ‘늙지 않는 꽃’입니다. 학명 Ageratum이 그리스어로 ‘늙지 않는다(ageratos)’는 뜻인데, 꽃이 오래도록 색이 바래지 않고 곱게 유지되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에요. 그래서 꽃말도 ‘신뢰’, ‘변치 않는 믿음’입니다. 이름과 꽃말이 한 몸처럼 이어지는 꽃이지요. 멕시코엉겅퀴, 풀솜꽃이라고도 부릅니다.

  • 학명: Ageratum houstonianum Mill.
  • 과: 국화과(Asteraceae) / 등골나물아재비속(Ageratum)
  • 원산: 열대 아메리카(멕시코·페루)
  • 한살이: 여름~가을(대략 7~10월) 가지 끝 산방꽃차례에 핀다. 키 30~60cm, 줄기 전체에 끈끈한 털이 빽빽하다.

꽃색은 청색 계통이 주를 이루고 연분홍·흰색도 있습니다. 사실 식물의 세계에서 파란색은 꽤 귀한 색이라, 아게라텀의 이 청보라빛은 화단에서 특별한 대접을 받습니다.

한 송이가 아니라, 수십 송이

이제 아게라텀의 진짜 정체를 봅니다. 국화과의 라틴명 Compositae는 ‘많은 꽃이 합쳐졌다‘는 뜻이에요. 국화과 꽃들은 아주 작은 꽃 수십~수백 송이가 머리 모양의 꽃턱에 조밀하게 모여 두상화(頭狀花, head)를 이루고, 이 전체가 마치 한 송이처럼 보입니다. 민들레도, 해바라기도, 개망초도 다 그렇지요.

아게라텀의 솜방망이 하나도 바로 이 두상화입니다. 다만 해바라기 같은 넓적한 꽃잎(설상화)이 없고, 바소꼴의 가느다란 통꽃(통상화)만 조밀하게 모여 있어요. 재미있는 건 피는 순서입니다. 두상화는 바깥 변두리부터 안쪽으로 차례차례 피어 들어갑니다. 그래서 한창 피는 두상화를 보면, 가운데는 아직 벌집처럼 촘촘한 봉오리인데 가장자리에서만 실 같은 꽃이 먼저 풀려 나오지요(아래사진).

아게라텀 두상화 하나의 극접사 — 가운데는 연보라색 통꽃 봉오리 수십 개가 벌집처럼 조밀하게 돔을 이루고, 바깥 가장자리부터 실 같은 꽃이 벌어지기 시작함
피기 전 아게라텀 봉오리 초극접사 — 꽃턱잎(포)에 싸인 통꽃 봉오리들이 육각형 벌집처럼 촘촘히 박히고, 턱잎이 벌어지며 흰 털 같은 꽃부분이 서리처럼 올라옴

피기 전, 꽃턱잎 속의 준비

두상화를 더 확대해 보면, 낱낱의 단위가 아직 꽃턱잎(포)에 싸인 봉오리라는 걸 알 수 있습니다. 벌집처럼 육각으로 맞물린 이 봉오리들은, 꽃턱잎이 벌어지면서 그 속에 감춰 두었던 실 같은 꽃부분을 하나씩 밀어 올립니다. 사진에서 봉오리마다 흰 털처럼 삐져나온 것이 바로 그 순간이에요. 아직 피지 않은 꽃도, 이렇게 질서정연하게 제 차례를 기다리고 있는 셈이지요.

막 벌어지는 아게라텀 통꽃 접사 — 바소꼴 통꽃의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짙은 보라색 중심에 잔털이 돋음
아게라텀 통꽃에서 뻗어 나온 갈래 암술대 접사 — 둘로 갈라진 연보라색 실 모양 구조가 표면에 오톨도톨한 돌기를 두르고 솜털처럼 휘어져 있음

네모 안의 공동체

꽃턱잎이 열리면 비로소 통꽃이 얼굴을 내밉니다. 바소꼴로 가느다란 통꽃의 끝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고, 그 속에서 둘로 갈라진 암술대가 실처럼 길게 뻗어 나옵니다. 솜방망이의 그 보드라운 ‘솜털’의 정체가 바로 이 갈래 진 암술대와 가느다란 통꽃이에요. 암술대 표면은 꽃가루를 붙잡기 좋은 미세한 돌기로 덮여 있습니다.

맨눈에는 그저 보드라운 솜뭉치였던 것이, 네모난 렌즈 안에서는 수십 송이의 통꽃과 갈래 진 암술대가 변두리부터 차례로 피어나는 정교한 합창으로 펼쳐집니다. 작은 것 하나로는 눈에 띄지도 않을 꽃들이, 서로 기대어 뭉쳤을 때 비로소 벌과 나비를 부르는 하나의 신호가 됩니다. ‘신뢰’라는 꽃말이, 이 구조 안에 이미 새겨져 있는 셈이지요.

늙지 않는 꽃의 두 얼굴

아게라텀의 쓰임은 다양합니다. 무엇보다 꽃에서 드문 청보라색을 오래 유지해, 화단·화분·경계 심기와 꽃꽂이에 두루 쓰입니다. 색이 한정돼 있어 메리골드·샐비어·백일홍 같은 꽃과 어우러지게 심으면 서로를 돋보이게 하지요.

그런데 이 ‘늙지 않는 꽃’에는 놀라운 뒷면이 있습니다. 아게라텀은 스스로를 벌레로부터 지키기 위해, 곤충의 성장·변태를 조절하는 호르몬 작용을 교란하는 물질(프레코센 등)을 만들어 냅니다. 쉽게 말하면 벌레가 제때 ‘어른’이 되지 못하게 방해하는 것이지요. 실제로 아게라텀 추출물은 모기 기피·유충 억제 효과가 연구되고 있습니다. 색이 늙지 않는 꽃이, 곤충의 시간표까지 붙잡아 두는 셈이니 이름값을 단단히 하는 식물입니다.

다만 꼭 기억할 주의가 있어요. 아게라텀(등골나물아재비속)은 간에 해로운 피롤리지딘 알칼로이드를 품고 있어, 사람은 물론 소·말 같은 가축이나 반려동물이 삼키면 간 손상이나 소화기 이상을 일으킬 수 있습니다. 그러니 이 꽃은 눈으로만 즐기는 관상식물로 대하는 것이 안전합니다. (이 글은 정보 제공을 위한 것이며, 의학적 조언을 대신하지 않습니다.)

닫는 글 — 작은 믿음들이 모여

하나인 줄 알았던 것이 실은 수십의 마음이었습니다. 혼자서는 스칠 만큼 작은 꽃들이, 바깥에서부터 안으로 서로 어깨를 겯고 차례로 피어나 마침내 한 송이의 신뢰가 되었습니다. 색은 쉬이 바래지 않고, 이름은 늙지 않는다 하고, 꽃말은 변치 않는 믿음이라 합니다.

찬찬히 들여다볼수록 신기하고 아름다운 꽃. 네모난 렌즈 안에서 아게라텀은 오늘도, 작은 것들이 모여 이루는 단단한 세계를 조용히 보여 줍니다.

— 네모안의 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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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저작권은 Dr. KOSUNA 에게 있으므로 무단 복제 금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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